정보화마을 서귀포 감산계곡마을

  • HOME
  • 마이인빌
  • 메일
  • 고객센터
  • 감산계곡마을 감산계곡마을 감산계곡마을 감산계곡마을 감산계곡마을

    마을약사

    감산리의 설촌은 1580년(선조 18) 고씨의 선조가 "묵은터"에 정착하면서부터로 추정되고 있음.

    이 무렵 "통물동네"에는 유씨도 들어와 산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한때 세력다툼으로 고씨의 감산과 유씨의 통천 두마을로 나눈때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오고 있음.

    1730년대에 이 마을 "장기터"에 귀양와 살았던 서제 임선생의 유허비도 남아 있어 이 무렵에 촌락이 형성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음.

    선조의 대정현의 행정치소였던 이곳은 1939년에는 면사무소가 화순리로 옮겨갔고 안덕계곡이 있는 이 마을에는 고씨, 유씨, 강씨와 전씨, 이씨, 오씨 등이 많이 살고있음.

    지명유래

    뱀복대기

    • 위치 : 감산리 통물옆
    • 유래와 현황 : 신남동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며 옛날 이길에 큰뱀이 자주 나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으므로, 주민들이 무섭고 걱정이 되어 인근 장기터 동네에서 무당굿을 벌이고 장구와 북을 치며 뱀을 당으로 몰아 넣었다 하여 유래되었다.  

    안골

    • 위치 : 감산리 안덕계곡다리 아래 지역 일대
    • 유래와 현황 : 동안골과 서안골로 나뉘며 안으로 움푹히 들어갔다 하여 '안골'이라 불리운다. 인근 주위는 답지대로 물이 풍부하여 벼를 많이 재배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감귤과수원과 전작으로 전환되었다.  

    도고샘

    • 위치 : 감산리 동부락 냇가
    • 유래와 현황 : 안덕계곡다리 인근지역으로서 돌(바위)밑으로 샘물이 솟는다 하여 유래 되었으며, 울창한 상록수와 물이 풍부하여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솔대왓

    • 위치 : 감산리 마을 동부락 상창 경계지점
    • 유래와 현황 : 무예를 연마하며 활을 쏘던 터라서 '솔대왓'으로 불리며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이조 태종 16년에 개설하여 지방 무과 시험장으로 합격자는 선달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통물동

    • 위치 : 감산리 마을 위 통물 일대
    • 유래와 현황 : 통물을 근거지로 촌락이 형성 되었다는 뜻으로 불리워지며, 이곳 주민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이용 되었으나 지금은 수원량이 줄어들어 거의 이용치 않는다.  

    안덕계곡

    • 위치 : 감산리 마을 앞 계곡
    • 유래와 현황: 고려 목종 10년 하늘이 울고 땅이 진동하고 구름과 안개가 낀지 이렛만에 군산과 같이 용립했다고 하여 전해지며, 시냇물이 암벽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 치안치덕한 곳이라 하여 안덕계곡이라 불리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 지대이다.

    월라봉

    • 위치 : 감산리 안덕계곡 남쪽 2km 지점 봉우리
    • 유래와 현황: 이곳에는 5색토(백·청·적·녹·갈색)가 지하에 매장되어 있어 이를 채취하여, 건축물의 벽채나 바닥을 도벽하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이 흙에는 광석(알미늄)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며 산의 모양이 달이 떠오르는 모습과 같다는 데서 유래됐다.  

    서제 임선생 조려 유허비

    • 위치 : 감산리 장기터 동네
    • 유래와 현황: 서제 선생은 조선 숙종과 영조조의 인물로 27세때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간신들의 모함으로 제주특별자치도에 귀양온 후 지역민들에 학문을 가르치셨던 분으로, 서제 선생의 5대손인 헌대라는 분이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비문을 작성 설립 하였다. 이 비문에 의하면 감산리는 100년이내 감귤나무가 무성할 것이라는 대목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감산촌(柑山村) / 감산리(柑山里)

    • 위치 : 감산리 373번지 중심지 마을회관 중심
    • 유래와 현황 : 고려조 목종10년(서기 1007년)에 화산폭발로「군산」과 「월랑봉」이 융기하여 솟아나면서「안덕계곡」과 「창고내」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역사깊은 마을로 고려때부터 이미 집집마다  감귤이 재배되었던 데서 「감산리」라는 마을이름을 짓게 된 연유라고 하며 일제강점기 때는 면소재지로서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다른 마을이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거나 고쳐 부른 경우가 허다한데 이 마을은 조선조때까지는 <감산촌(柑山村) >으로 해방 후에는「감산리(柑山里)」라는 단일이름을 고수한 마을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고려조 말기부터 수많은 유배객들이 적거되거나 위리안치되는 일이 빈번했으며 이를 계기로 이들에 의해 마을에 학문이 전수되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서기 1948년 <4·3 >으로 인해 화재를 당하면서 마을의 내력을 기록하여 보관하던 "지동궤"를 소실, 문헌을 잃고 말아 구전에 의하거나 기억력에 의존하여 마을의 역사를 더듬을 따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