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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산계곡마을 민속전시관

    감산계곡마을은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중산간 마을같이 보이지만 넓은 바다에 접해 있고, 또한 여러 오름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4계절 물이 흐르는 감산천, 관광명승지인 안덕계곡 등 천혜의 자연환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온화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양반촌으로 알려진 자랑스런 고장입니다.

    감산계곡마을 마을정보센터에 위치한 민속전시관은 감산계곡마을 자체적으로 전통적인 삶의 흔적들을 모아 의생활, 식생활, 주생활을 테마로 전통적인 민속박물관을 꾸몄습니다.

    정지에 전기와 가스가 들어오면서 그 공간의 구조와 생활양식이 크게 변했다. 마을에 전기는 1969년, 그리고 가스는 1979년부터 들어왔다. 가벼운 밥솥과 냄비가 무거운 무쇠솥을 몰아내 버렸다. 솥은 크기에 따라 다섯 가지가 있었다.

    • 두말띠기(집안에서 큰일을 치를 때 밥을 짓거나 고기를 삶을 때)
    • 웨말치기(밥을 짓거나 술을 빚는 고소리와 떡을 찌려고 시루를 앉힐 때)
    • 중솟(밥을 짓거나 그것에 맞는 시루를 앉힐 때)
    • 옹주리(국을 끓이거나 반찬을 만들 때)
    • 잔철(솥 중에서 가장 작은 솥)

    가레

    한국 본토의 맷돌과 같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이것을 두고 '가레'라고 한다. '갈다'의 제주어 '가다'의 '가-'과 명사형어미 '-에'로 이루어진 말이다. 메밀, 콩, 벼나 여러 가지 열매를 정곡(精穀)하거나 가루로 만들 때 쓰였다.

    가레는 마을 서쪽 화순리와의 경계점에 있는 '굴렁팟'과 지금 관광지로 소문난 안덕계곡의 돌로 만들었다. 가레는 맷돌과 같이 위짝과 아래짝으로 이뤄졌다. 회전하는 중심에 꽂힌 여문 나무를 '중수리'(또는 '가레좃'), 위짝에 있어 이것을 싸고돌게 된 구멍을 '중수리고망' 또는 '가레씹'이라고 한다. 중수리의 나무는 '솔피낭'(쇠물푸레나무)을 고집했다. 위짝에는 쌀을 넣는 구멍과 '족낭'(때죽나무)으로 만든 ㄱ 자의 손잡이가 꽂혀 있다. 쌀을 넣는 구멍 위쪽 주위에는 둥그렇게 홈을 냈다. '가레홈'이라고 한다. 그 바닥에 시멘트를 발랐다. 제주도 화산돌은 구멍이 솜솜하기 때문에 쌀방울이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메워버린 것이다.

    가레는 보통 두 사람이 손잡이를 마주 잡고 앉아 돌렸다. 세 사람이 돌릴 때는 '가레체경'을 쓰기도 했다. 가레체경이란 가레를 돌리는 보조 맷손으로 체경과 가레의 마찰을 줄이려고 가레체경이 끼워진 손잡이 위아래에 짚으로 꼰 노를 두르기도 했다. 이를 '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손잡이를 잡아 가레를 돌릴 때 다른 한 가람은 뒤에 물러앉아 가레체경 끄트머리를 잡아 밀고 당기며 돕는다.

    국자

    솥에서 끓인 국이나 죽 등의 음식을 떠내는 그릇이다. 나무로 만들었다. 달리, '남자'라고도 했다. 이윤택씨가 기증한 것이다.

    재떨이

    오기남(남, 1916년생)씨가 40세 안팎에 만들어 쓰던 것이다. 동백나무로 만들었다. 재떨이 한가운데는 직경 4cm의 혹이 달렸다. 골연을 비벼 끄거나, 담배통 안에 남아 있는 재를 털어내기 좋게 만들었다.

    빙철

    빙떡을 만들려고 떡을 넓적하게 지지는 철판이다. 마치 솥뚜껑을 뒤엎어 놓은 것과 같은 모양으로 무쇠로 만들었다. 한쪽에는 쇠고리가 붙어 있어 쓰지 않을 때는 정지 벽에 걸어두고 하는데, 쓰다보니 고리가 빠져 버렸다. 빙철이 없는 집안에서는 이웃집에서 이것을 빌어다 쓰기도 하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솥뚜껑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함박

    나무로 만든 밥그릇이다. 죽그릇으로도 쓰였다.

    제주도의 흙은 철분이 많이 배어 있어 고급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밥그릇 따위를 나무로 만드는 수가 많았다.

    이 그릇을 즐겨 쓰다가 자료실에 기증한 박영두(여 ㆍ1924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2인용 그릇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1892년생)가 '굴묵이'(느티나무)로 만든 것인데, 그 사연을 들려주었다.

    -> 내 나이 아홉 살 때(1934년), '모륵밧'에서 이 마을 '벵뒤가름'이라는 동네로 옮겨 살았다. 우리 동네 앞까지 흘러온 '창곳내'를 두고 '앞내'라고 했다. '앞내'에는 아름드리의 '굴묵이'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곳에 있는 나무는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 나무를 마을로부터 샀다. 그 나무를 도끼로 쳐 잘라내고 대톱으로 오려냈다. 굵은 쪽의 것은 궤를, 그리고 가는 쪽의 것은 함박을 만들었다.

    담배통

    제주도에서는 잎담배를 피우는 연장은 두 가지가 있었다. 백철로 만든 것을 '쉐담뱃통' 그리고 나무로 만든 것을 '남통머리'라고 했다. 마을자료실에는 '남통머리'는 없고 쉐담뱃통 뿐인데 오태윤씨가 기증한 것이다.

    백철로 만든 잎담배를 담는 통과 빨대를 수리대에 끼워 만들었다. 담배 진이 가득 찼을 때는 빨대를 빼낸 후 '새'로 그것을 후벼냈다.

    떡고도리

    떡가루를 익반죽할 때 찐 떡감을 빻을 때, 그리고 제삿날 멧밥을 나를 때도 쓰였다. 강종남(남, 1963년생)씨가 마을자료실에 기증한 것이다. 그의 어머니(1938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강씨의 5대조 때부터 만들어 쓰던 것이라고 한다. '굴묵이'(느티나무)로 만들었다.

    시리

    솥 위에 올려놓고 김으로만 떡을 쪄내는 시루이다. 제주도에서는 이것을 '시리'라고 한다. 크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크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은 옹주리 용의 것이어서 '옹주리 시리'라고 한다. 제주도의 솥은 크기에 따라 이름이 있다.

    마을자료실에 있는 중솟의 직경은 29.7cm인데 옹주리는 그것보다 작은 솥이다. 바닥 한가운데 직경 3.8cm의 구멍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직경 3cm 보다 작은 구멍 다섯 개가 나 있다. 이것에서 대승 두 되 치의 쌀가루의 떡을 쪄낼 수 있다고 한다.

    고소리

    소주를 고는 소줏고리의 제주어로 한말들이 솥에 얹는 것이다. 이런 고소리를 '웨말치 고소리'라고 한다. 고순화(여. 1922년생)씨가 쓰던 것이다.

    고소리는 알통과 웃통으로 이뤄졌다. 알통 밑바닥 한가운데 직경 17cm의 큰 구멍이 나 있고, 테두리에도 직경 1.7cm의 구멍이 여섯 개 나 있다. 하나의 구멍은 고소리를 빚는 과정에서 막혀 버렸다. 솥에 불을 때는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구멍인 셈이다.

    그리고 알통 오른쪽 어깨에는 손잡이가, 웃통 왼쪽에는 혹이 달렸다. '고소리두던'이라고 한다. 피어오른 김을 모여 두는 공간이다. 바로 그 아래쪽에 고소리두던에서 이뤄진 술방울이 흘러내리는 길쭉한 관인 '고소리좃'이 붙어 있다. 그리고 위에는 냉각수 그릇인 장테가 있다. 원래 고소리에 장테가 붙어 있었는데 쓰는 동안에 떨어져 버렸다. 한 솥에서 술을 고는 동안에 3~4회 쯤 물을 갈아줘야 한다. 한 솥에서 잘되면 두 되, 보통 한 되 반의 술이 만들어진다.

    우금

    놋쇠로 만든 밥주걱이다. 밥주걱을 '우금'이라고 했다.

    바지팽

    '받이 병'이라는 제주어다. '고소리좃'으로 떨어지는 술을 받는 두 되들이 오지그릇이다. 물을 길어 나르는 허벅에 비하여 목이 좁다. 고소리좃에 딱 들어맞게 만든다.

    배수기

    달리 '남죽'이라고 발화하는 수도 있다. 그리고 제주도 동부에서는 '남술'이라고도 한다. '사오기'(왕벚나무)로 만든 것이다. 본토의 죽젓광이와 비슷한 것인데, 그 쓰임만은 제주도의 것이 더욱 다양한 편이다.

    보리밥을 지을 때 물이 골고루 감돌게 하려고 저어줄 때, 보리나 콩을 볶을 때 골고루 볶아지게 저어줄 때, 그리고 콩죽을 쑬 때 죽감이 바닥에 눌지 않게 잘 저어줄 때 쓰였다.